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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9] 세계 최대 제조기지 에버렛 공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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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Admin 작성일16-05-09 10:20 Hit2,768 Count Comments0 Cou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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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새로운 과학과 산업의 선구자로서 한배를 탔다. 우리가 가진 숙제는 늘 새롭고 흔치 않아서 누구도 확신에 찬 우리의 참신한 생각을 ‘그건 현실이 될 수 없다’고 묵살하지 않는 게 마땅하다.”(윌리엄 보잉) 

1916년 보잉사를 창업한 윌리엄 보잉(1881~1956)은 자신의 철학을 직원들과 공유하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 인재를 중시한 그는 ‘도전과 혁신의 유전자(DNA)’를 조직 구성원과 나눔으로써 이 정신이 회사의 철학으로 남겨지길 희망했다고 한다. ‘빌’(윌리엄 보잉의 약칭)의 바람은 그가 죽은 지 60년이 지난 지금 보잉의 문화로 자리매김한 것처럼 보였다. 보잉 에버렛 공장에서 만난 직원들은 “우리는 항상 위기를 말해왔고, 만약 위기가 없었다면 오늘의 보잉도 없었을 것”이라고 주저 없이 말했다. 지난 4월 25일, 올해로 창사 100주년을 맞은 보잉사를 취재하기 위해 미국 시애틀에서 북쪽으로 40㎞가량 떨어진 작은 도시 에버렛을 찾았다. 에버렛 인구는 10만여명. 보잉 공장의 상시 근무 인력은 3만5000명에 달한다.

세계 최대 기네스북 등재 

상업용 항공기와 군사용 항공기 생산이라는 양 날개로 움직이는 보잉사는 1968년 이곳 에버렛에 회사의 맏형 격인 상업용 항공기 제조공장을 건설했다. 이 공장은 1980년과 1993년 두 차례에 걸친 확장을 통해 현재 바닥 면적 415만㎡(125만평)의 규모로 커졌다. 여의도 면적의 1.5배 규모다. 이 중 33만㎡(30만평) 규모의 땅 위에 천장 높이가 30m나 되는 직사각형 모양의 초대형 덮개를 씌운 단일 공장이 운영되고 있다. 이 공장은 미식축구(NFL) 경기장 75개를 모아놓은 규모와 맞먹는다.  에버렛 공장의 외관은 대형 출입문이 인상적이었다. 완성된 항공기가 드나들 수 있도록 앞뒤 좌우로 총 6개의 대형 출입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 사이즈에 입이 벌어진다. 크기 가로 107m, 세로 25m로 미식축구장 사이즈에 버금간다. 공장 내부는 또 어떤가. 최장거리가 1.4㎞가 넘어 직원들은 전기차(카트)를 타고 이동하거나 자전거로 소형 자재를 실어 나르고 있었다. 비행기 제조에 필요한 대형 자재들은 공장 천장에 달린 크레인을 통해 운반되는데, 기자가 찾아간 날도 크레인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공장 VIP투어 담당자인 리암 네드레드에 따르면, 공장 내부에서는 15대 이상의 항공기를 동시에 제작하는 게 가능하다.  공장 곳곳에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등 한국에서 납품된 자재들도 보였다. 보잉의 한국 협력사들은 기술력과 품질 그리고 시간준수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공장 내부에는 없는 게 없었다. 커피숍, 세탁소, 마사지숍, 은행 입출납 창구 등의 편의시설이 입점해 있다. 이 중 한 커피숍은 미국 내 프랜차이즈점 가운데 최고의 매출을 올리는 지점으로 유명하다. 투어 담당자 리암 네드레드는 “공장 내에 비치된 자전거만 500대가 넘는다. 한국 창덕궁보다 더 큰 에버렛 공장은 세계 최대 규모의 공장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다”고 말했다.  공장은 3교대로 24시간 가동된다. 오전 업무는 새벽 6시에 시작되기 때문에 해당 직원들은 새벽 5시면 출근한다.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주말 근무도 하지만, 비용 문제 등을 고려해 최근에는 주말 생산라인 가동을 최소화하는 분위기라고 했다.    보잉 에버렛 공장에서는 B747, B777, B787 등의 중대형 기종을 한 달 평균 21.5대를 생산한다. 주말을 제외하면 하루 평균 1대의 비행기를 완성하는 셈이다. 이 수치에는 여객기뿐만 아니라 화물기도 포함된다. 월 42기를 생산하는 B737 같은 싱글아일(복도 1개) 기종은 시애틀 남쪽의 랜턴공장에서 만들고 있다.  공장 안은 대낮처럼 환했다. 공장 내에 설치된 전구 숫자가 100만개를 넘는다고 했다. 비행기 한 대에는 총 600만개에 이르는 크고 작은 부품들이 들어가는데, 사람의 손에 의해 조립된다. 그런데도 하루 1대 이상의 비행기를 완성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 수준의 생산성을 확보하기 위해 보잉은 일부 생산라인의 자동화를 구축했다. 예컨대 B777 생산라인은 일본 자동차업체인 도요타의 생산 모델을 도입한 바 있다. B777 생산은 커다란 무빙라인(Moving line) 위에서 시작되는데, 동체가 완성될 때까지 이 무빙라인이 1시간에 2인치(5.08㎝)씩 움직이며 순차적으로 부품 조립이 이루어진다. 시간당 조립과정이 철저하게 지켜지는 시스템으로, 보잉은 이런 라인 설계를 통해 생산성과 효율성의 극대화를 꾀하고 있었다. 비행기 생산은 한 차종을 수십만 대씩 양산하는 자동차와 달리 대부분 사람 손을 거쳐 제조되기 때문에 생산라인 또한 혁신의 대상으로 손꼽힌다.  이렇게 완성된 비행기는 공정이 마무리된 직후 커다란 공장 문을 열고 출고 대기장으로 이동한다. ‘플라이트 라인(Flight Line)’으로 명명된 대기장에서는 유럽, 중동, 아시아 등 각국의 항공사 고유 문양과 색깔을 입힌 수십 대의 비행기가 줄지어 서 있었다. 그곳에는 대한항공 마크가 새겨진 여객기도 보였다.  사실, 공장 전체 부지는 기자가 묘사한 것보다 훨씬 크다. 부지 내에 활주로와 입출국장이 딸린 김포공항 규모의 공항시설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또 고속도로가 보잉 에버렛 부지를 관통한다. 기자가 숙소에서 불과 4㎞ 정도 떨어진 보잉 공장까지 이동하는 와중에도 고속도로를 올라탔다가 다시 빠져나와야 했다.  보잉의 고객인 세계 항공사들은 ‘보잉 딜리버리 센터(Deliverly Center)’에서 직접 비행기를 인도해 각국으로 운송한다. 이 센터 앞에 설치된 활주로는 비행기의 시험비행에도 이용되지만 새 비행기가 인도될 때는 사실상 국제공항으로 변신한다. 항공기 인수를 위해 방문한 항공사의 파일럿과 직원들은 신형 비행기에 탑승해 본국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이 센터에는 공항처럼 입출국 관리 및 세관 직원이 배치된다.

창업주 보잉 자발적으로 주식 매각 

보잉 홍보담당자인 캐빈 유는 “소프트웨어 시대에 세계 최대 제조기업이 생존할 수 있는 비결은 인재와 기술력에 있다”고 말했다. 보잉의 창업주가 강조한 것도 바로 인재 경영이었다. 창업주 윌리엄 보잉은 원래 목재 사업을 하던 독일계 미국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당시 목재 사업으로 큰돈을 번 보잉의 아버지는 아들이 목재 사업을 잇기를 바랐지만 윌리엄 보잉은 비행기라는 자신만의 비즈니스를 찾아나섰다.  이에 앞서 오빌 라이트와 윌버 라이트 형제는 1903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처음으로 동력을 이용한 비행기를 제작, 시험비행에 성공했다. 이 소식을 접한 윌리엄 보잉은 “하늘을 나는 건 새로운 미래”라고 판단했고, 이때부터 비행기를 직접 타기 위해 미국 전역을 돌아다녔다. 그의 열정을 아는 직원들은 “빌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 탁월한 사업가였다”고 입을 모았다.  1910년 윌리엄 보잉은 LA에서 개최된 에어쇼에 가서 3일 동안 비행기 동승을 요청하고 다녔다. 다른 사람이 만든 비행기라는 물건을 직접 타보고 싶었던 것이다. 마침 긍정적인 답변을 준 비행사를 만나 승선을 허락받았으나, 이튿날 현장에 다시 갔을 때 프랑스에서 온 비행사는 자취를 감췄다. 라이트 형제가 특허권 침해에 대한 소송을 제기한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프랑스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915년 시애틀에서 글렌 마틴이 제조한 비행기에 처음 탑승할 기회를 잡았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나서 “이것보다 나은 비행기를 만들 수 있겠다”고 판단했고, 1916년 보잉사를 창업했다. 참고로, 글렌 마틴은 현재 세계 최대 전투기 회사인 록히트마틴사(社) 탄생의 주역 중 한 명이다.  당시 라이트 형제는 처음 비행기를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비행기 개발에 힘을 쏟는 대신 특허권을 지키려 변호사를 고용하고 소송을 제기하느라 허송세월을 했기 때문이다.  윌리엄 보잉은 젊은 시절 한때 매사추세츠공대(MIT)를 다니던 과학도였다. 그는 MIT에서 졸업장을 받지 못했지만 과학적 지식은 상당했다. 그는 회사 설립을 결정한 이후 함께 비행기를 만들 동지를 찾아나섰고 마침 해군 핵심기지가 있던 시애틀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던 조지 웨스트벨트를 만나 첫 비행기인 B&W를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보잉의 전신인 비행기 제조사 PAPC를 세웠다. 1917년 이 회사의 이름은 보잉사로 바뀐다.

보잉은 타고난 비즈니스맨이었다. 재능을 가진 인재는 어떤 편견도 없이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가 보잉을 설립하고 나서 처음으로 영입한 엔지니어가 중국계 미국인 왕추(Wong Tsu)라는 사실에서도 그의 인재관을 엿볼 수 있다. 왕추는 나중에 고국으로 돌아가 엔지니어로 활동했다. 보잉은 남보다 늦게 비행기 개발에 뛰어들었지만 사람을 찾는 안목과 연구개발에 대한 열정을 통해 앞선 비행기 개발자들을 추월했다.  보잉의 사사(社史) 담당자인 마이클 롬바르디는 이와 관련, “빌은 젊은 부자였지만 독립적이고 비즈니스 마인드가 충만했다. 빌은 남들이 하는 방식을 쫓아가는 걸 거부했고, 그 덕에 보잉은 처음으로 쇠를 이용한 비행기를 제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보잉은 비행기 생산을 시작한 지 5년 만에 다시 여객 및 화물운송을 위한 항공사를 설립했다. 이게 오늘날 미국을 대표하는 유나이티드항공의 전신이다. 당시 보잉이 운영한 항공사는 항공화물 운송과 우편배송에 나서 화제를 모았고 성장가도를 달렸다. 윌리엄 보잉은 회사가 커지자, 지주회사도 만들었다. 보잉은 비행기 제조회사, 항공사, 엔지니어 회사 등을 거느린 대기업으로 발돋움했다. 1929년 세계적 불황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미국 내에서 흑자와 성장을 거듭하는 회사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던 중 미국 정부는 보잉의 급속한 성장이 탈법과 불법의 결과가 아닌지 의구심을 품으며 결국 보잉에 대한 조사까지 진행했다. 그러나 정부 조사에서 보잉의 불법 운영에 대한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미국 내에서는 독점사업자에 대한 규제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한다. 비행기 제작에 필요한 모든 부품과 제조공장, 그리고 항공사까지 수직 계열화된 회사를 운영하며 돈을 벌던 보잉 같은 회사가 타깃이 됐다. 윌리엄 보잉은 정부의 규제가 시행되기 전 스스로 결단을 내렸다.    1934년 회사 경영에서 물러나는 것은 물론 계열사를 모두 매각하기로 했다. 그 대신 인재 양성과 국가 발전을 위해 대학과 연구기관에 자신의 주식을 팔아 기부했다. 마이클 롬바르디는 이렇게 설명했다. “비행기는 빌의 열정에서 출발했다. 돈 때문에 회사를 만든 게 아니었다. 그가 만들었던 비행기 관련 회사들이 미국 사회에서 큰 역할을 해주길 바랐다. 빌은 부자이면서 애국자였다.”  윌리엄 보잉은 기업가로서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었지만 그 길을 가지 않았다. 회사를 매각한 그는 농장에서 말을 키웠고 때론 요트를 타고 알래스카로 낚시를 다니며 여생을 보냈다. 윌리엄 보잉의 자손들은 보잉에서 일하는 대신 각자 별도 사업을 하거나 목장을 운영했다. 보잉이 물러난 뒤 보잉사와 유나이티드항공사는 주식회사로서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윌리엄 보잉이 떠난 뒤 보잉의 역사는 ‘창업주의 역사’가 아니라 ‘기술과 혁신의 역사’로 패러다임이 전환됐다.

사상 최대 실적 거두고도 예비적 구조조정 

세계 최대 제조기업인 보잉사도 여느 기업과 마찬가지로 몇 차례 위기를 맞았다. 보잉의 직원들은 ‘위기는 곧 기회’라는 도전정신이 위기극복의 원동력이 됐다고 분석했다. 1·2차 세계대전은 항공산업의 혁명적 발전을 이끌었지만 전후(戰後) 비행기 제조업체들은 수주(受注)가 급감하며 위기를 맞았다.  1950년대 보잉사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회사의 명운을 건 연구개발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바로 제트엔진 개발이다. 보잉에 앞서 BOA(British Oversea Airway)가 제트엔진을 만들었지만, 위험성 때문에 제트항공기는 실용화 단계로 접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윌리엄 알랜 당시 보잉 사장은 “제트엔진이 항공기의 미래고, 우리는 미래로 나아간다”는 결정을 내린 뒤 당시 1600만달러를 투입해 상업용 제트기 개발에 뛰어들었다. 이때 다시 많은 인재가 보잉에 영입됐다. 제트엔진을 기반으로 한 B707 기종의 수주는 폭발적이었다. B707기는 당시 미국 대통령이 타는 ‘에어포스원(Air Force One)’으로도 납품됐다.  보잉사는 제트엔진은 전투기에서나 사용할 수 있다는 편견을 뒤집기 위해 일반인을 상대로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일반인의 관심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자, 항공기시장에서 제트기 수요의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도박에 가까운 도전을 통해 추락하던 항공산업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됐다. 보잉사는 1960년대 달 탐사 우주선 개발(아폴로 프로젝트)에도 참여하며 민간 항공업체로서 새로운 하늘길을 여는 데 일조했다.  1970년대 보잉사는 400명을 태우고 대륙을 이동하는 점보제트기 B747의 판매 부진과 승객 감소, 연료비 상승 등의 여파로 또 한 차례 위기를 맞는다. 한때 10만명을 넘었던 직원 가운데 5만명을 감원하는 고통이 뒤따랐다. 이때도 보잉은 기술적 진보로 다시 위기를 돌파했다. 보다 빠르고 조용하며 에너지효율이 높은 B737과 B757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1997년 보잉사는 명암이 엇갈리는 시기였다. 대형 인수합병을 통해 회사가 팽창했으나 이와 함께 위기도 수반됐다. 보잉사는 전투기와 헬리콥터 등을 생산하던 미국의 대표적 군수업체 맥도넬더글러스사를 인수하며 국방산업 접수에 나섰다. 동시에 B787 기종 개발에 착수했다. 하지만 상업용 항공기 생산에 주력해온 보잉과 군수용 항공기를 생산해온 맥도넬더글러스사는 기업 문화에서 큰 차이를 보였고 통합과정에서 불협화음이 이어졌다. 더욱이 신기종 개발사업은 시험비행 과정에서 문제가 발견되며 개발기간이 장기화됐다.  보잉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기술혁신에 올인했다. 철이나 알루미늄으로 만들던 항공기 동체를 탄소섬유로 대체해 ‘튼튼하면서도 가벼운’ 항공기 개발에 나섰다. 비행기를 가볍게 만드는 것은 연료 효율성을 높인다는 측면에서 항공산업의 가장 큰 숙제 중 하나였다. 혁신적인 기체 개발과 함께 비행기 날개도 새의 날개에 가장 가까운 설계를 채택해 비행기 양쪽 날개가 운행 시 뒤로 휘어지게 해 공기마찰을 최소화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B787 기종은 공기오염을 줄이고 재활용률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비행기 안에 설치한 창문은 덮개를 없애고 자동으로 햇빛을 차단하는 기술도 도입했다. 보잉사는 이처럼 새로운 기술 개발과 이를 상품화하는 데 항상 선구자 역할을 했다.  보잉사는 지난해 상업 항공 분야 매출에서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두고도 4000명 안팎을 감원했다. 장기적 관점에서 시장 여건이 불안해지는 것을 대비한 선제적 구조조정이었다. 기술 개발과 동시에 구조조정을 적기에 하는 것은 붕괴 직전의 국내 조선업과는 차원이 다른 접근방식이다.  보잉은 또 고객중심의 서비스를 구축하기 위해 B787 드림라이너 갤러리도 오픈했다. 마케팅 혁신의 일환으로 만든 드림라이너 갤러리는 보잉의 고객인 항공사 관계자들이 와서 비행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수백 개에 달하는 내부 장비를 한자리에서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원스톱 서비스다. 과거에는 고객사가 원하는 장비를 각 공급업체로부터 납품받아 설치해야 했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이 낭비됐으나 보잉사는 서비스 강화와 동시에 공기(工期)도 줄일 수 있게 됐다. B787 기종은 이런 기술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 항공사로부터 현재까지 총 1100대의 수주를 받았다. 대한항공도 20여대를 주문한 상태다. 보잉사 매니저 브랫 라모레의 말이다. “소비자인 항공사의 니즈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드림라이너 갤러리는 항공사 각 분야 관계자가 한곳에서 기내 장비를 일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고객들의 만족도가 높다.”

이젠 우주다 

보잉사는 이론적으로도 성공을 위한 요구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다. 영국과 미국에서도 조선학계 석학으로 인정받는 부산대 백점기 조선해양공학과 교수의 ‘4대 요소 이론’에 따르면 보잉은 추락하기 어려운 기업의 체질을 갖고 있다. 조선·항공 등의 제조업체가 성공하기 위한 4개 핵심요소는 인프라 구축, 기술 개발, 인재 육성, 전략적 비전이다. 보잉사의 경우 줄곧 방대한 인프라를 구축하고 인재를 중시하는 경영을 펴왔다. 또 위기 타개책으로 기술혁신을 선도했고 전문경영인은 전략적 비전을 제시하며 미래를 지향했다. 백점기 교수의 설명이다. 

“4대 요소이론은 특히 제조업 분야에서 성공을 위한 필수 요소이다. 국내 조선업은 기술혁신이 더뎠고 경영 능력이 저하된 채 오랫동안 방치돼 사면초가에 놓였다. 보잉처럼 남보다 한발 앞서 시대를 바라보는 지혜와 기술 개발에 대한 노력을 한국 제조업이 배워야 한다.”  보잉사는 현재 미래 100년을 위한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창업주인 윌리엄 보잉이 ‘항공은 미래’라고 했던 것을 넘어 이제 ‘미래는 우주’라는 비전을 구축한 상태다. 보잉사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지구에서 우주 왕복 셔틀을 타고 화성으로 여행을 떠나고 지구와 우주정거장을 스페이스 엘리베이터로 연결하는 것을 상상하고 있다. 멀고도 위험한 얘기로 들리겠지만, 우리는 이미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주간조선 김대현 기자 ok21@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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